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의 ‘초판본 한국소설문학선집’ 가운데 하나. 본 시리즈는 점점 사라져 가는 명작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이 엮은이로 나섰다.
이상의 문학은 가면을 쓴 채 아이러니와 패러독스를 생산하고 있기 때문에 전모가 드러나기 어렵다. 이 난해함은 그의 경우 근대 혹은 근대성과 연결된다. 아무리 근대가 애매모호하고, 일시적이며 불안정한 육체를 배제한 상태에서 투명하고 안정된 정신을 토대로 기획되어 왔다고 할지라도 육체의 모호함은 온전히 배제되지 않은 채 정신의 이면에 존재하면서 이중적인 층위를 형성해 왔다. 이상의 각혈하는 몸은 자기 소외와 자기 실존에 대한 불안과 공포라는 근대적인 삶에 대한 하나의 메타포로 기능한다. 하지만 그의 전략은 자신의 각혈하는 몸에 대한 향유의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창부의 몸은 소설 전편에 걸쳐 출몰한다. 이러한 창부의 몸 혹은 그 이미지들은 다른 어떤 대상보다도 글쓰기 주체의 의식에 강하게 각인되어 드러난다.
<지주회시>의 아내는 창부다. 어느 날 아내가 손님들에게 발길로 차여 층계에서 굴러떨어지자 글쓰기 주체는 “그대그락대그락하는몸이은근히다쳤겠지―접시깨지듯했겠지―아프다. 아프다”라고 말한다. 행간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몸을 파는 아내의 몸에 대한 심한 자의식이다. 점점 ‘말라깽이’가 되어가는 아내의 몸에서 각혈로 인해 점점 창백해져 가는 자신의 몸을 본 것이다. 아내의 몸에 대한 양가 감정은 결국 여성의 몸을 독화(毒花)로 인식하게 하는 계기를 제공하기에 이른다.
<날개>와 <봉별기>에 드러난 아내의 몸은 ‘나’를 살해하고 흡착하려는 무서운 몸[毒]이면서 동시에 가장 편안하고 안일한 그런 몸[花]이다. 창부인 아내의 몸이 가지는 이 독화로서의 존재성을 최후의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은 채 자신의 글쓰기 대상으로 삼는다. 마치 유서를 쓰듯이 소설을 썼다고 한 <종생기>에서도 이러한 독화의 양가성은 강하게 드러난다. <봉별기>에서 금홍의 몸은 생활에서 멀리 벗어나 있다. 금홍의 몸과 ‘나’의 몸은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면서 불투명하고 애매모호한 세계를 이룬다. 사물을 드러내는 어떤 절대적인 기준이나 준거가 캄캄하다는 것은 세계 인식의 차원에서 보면 모더니즘적이라고 할 수 있다. 모더니즘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는 포인트로 삼을 만한 어떤 절대적인 기준이나 준거가 없기 때문에 사회적·역사적 현실에 대한 객관적 관찰과 총체적 이해, 그리고 그 변화를 수반하는 미래에 대한 전망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모더니즘적 주체가 외적인 대상이 자신의 의식에 표상되는 모습 그대로 의식 밖에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 회의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결과 표상은 의식의 내면과 외면을 서로 매개하는 동시에 단절하고, 열어놓는 동시에 폐쇄하는 이중성을 띠게 된 것이다.
이 불일치의 체험은 현실 속에서의 극단적인 개인주의적 주체의 자기표현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내면성의 발견은 불안을 동반한다. 불안하기 때문에 주관과 객관의 대립을 화해시키고 내면과 외면의 분리를 재봉합하려는 시도를 보인다. 그러나 이상의 소설에 드러나는 글쓰기 주체는 그 불안과 공포로부터 도피하려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불안과 공포를 불안과 공포로 보려 한다. 이러한 의식은 근대에 대한 향유와 반성을 모두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모더니즘적이면서 동시에 포스트모더니즘적이라고 할 수 있다.
글쓰기 주체가 보여주는 몸을 통한 근대의 향유와 반성의 문제는 근대적인 도시 공간으로의 산책(散策)이라는 또 다른 몸 체험을 통해 새롭게 확장되고 변주된다. 근대적인 도시 공간으로의 산책은 몸의 감각과 근대적인 세계와의 상호 소통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것은 이상이 밀고 나간 근대적인 기획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성과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근대적인 도시 공간으로의 산책은 ‘내객의 눈에 의해 타자의 보여짐을 자각한 이후’(<날개>)에 이루어진다. 글쓰기 주체의 즉흥적인 산책을 통해 드러나는 각각의 병치된 공간과 그것의 치환된 형태로 드러나는 공간 사이에 형성되는 긴장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병치와 치환이라는 이러한 중층성은 기본적으로 근대적인 공간 자체가 그 안에 불가해한 요소와 결코 융합할 수 없는 어떤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글쓰기 주체의 눈에 근대적인 도시 공간은 불투명하게 드러난다. 근대적인 세계에 대한 이러한 문제의식은 경성이라는 근대적인 도시 공간을 단순히 외적 관찰이 아닌 내적 반성의 차원에서 인식하게 한다. 경성이라는 근대적인 도시 공간이 근대 및 근대성과 관련하여 전망의 불투명성을 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회탁의 세계 속으로 들어간 것은 비극성을 강하게 환기한다고 할 수 있다.
지난 세기까지 자명성의 원천으로 군림했던 자아 또는 주체를 몸에 대한 사유 속에서 재창출하고 우리의 존재 이해를 재형성하는 것을 진정한 근대성이라고 한다면 이상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근대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이상의 문학을 논하면서 자아의 분열 양상을 강조해 그를 마치 정신분열증 환자 취급을 한다거나 전기적인 사실을 강조해 그를 창백한 정신의 표면을 유랑하며 권태와 회의에 깊게 빠져 결국 여기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죽어간 비극의 주인공, 혹은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인 세계로 도피하려고 한 무미건조한 스타일리스트로만 간주하는 것은 그에 대한 온당한 평가라고 할 수 없다.
200자평
폐결핵으로 요절한 이상은 생전에 몸의 모든 에너지를 글쓰기로 소진했다. 이에 얻은 진정성은 모더니즘의 본질을 함축한다. 이상이 왜 진정한 모더니스트인가 하는 물음은 그가 근대에 대한 향유와 반성을, 몸을 통해 사유하고 실천했다는 사실에서 찾지 않으면 그 온전한 의미를 드러낼 수 없을 것이다.
지은이
1910년 9월 23일 새벽 6시경(음력 8월 20일 묘시경) 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사직동에서 아버지 김연창(金演昌)과 어머니 박세창(朴世昌)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3세 때 조부 김병복(金炳福)의 성화로 자손이 없는 백부 김연필(金演弼)의 양자로 들어가게 된다. 1917년 4월 인왕산 밑에 자리한 4년제 학교인 신명학교(新明學校)에 입학한다. 과목 중에 지리와 도화를 특히 좋아했다고 한다.
1921년 신명학교를 졸업한 뒤 불교 재단에서 경영하는 견지동의 동광학교(東光學校)에 입학한다. 하지만 해경이 입학한 지 4년째 되던 해 동광학교가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이 인수한 보성고보에 합병되어 4학년으로 편입하게 된다. 그림을 잘 그렸으며, 교내 미술전람회에서 <풍경>으로 입선하기도 한다. 1926년 3월 5일 보성고보를 졸업하고 해경은 곧장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에 입학한다. 12명의 입학생 중에 조선인은 불과 3명에 지나지 않았으며, 해경은 3년 동안 수석을 다툴 정도로 뛰어난 성적을 유지한다. 2학년 때에는 경성고공 회람지인 <난파선>의 편집을 주도했으며 여기에 삽화와 자작시를 싣는다.
1929년 3월 경성고공을 졸업하고 그해 4월 조선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사로 취직한다. 그해 11월 조선총독부 관방회계과 영선계 기수로 자리를 옮긴다. 12월 조선건축학회 기관지 <조선(朝鮮)과 건축(建築)> 표지 도안 현상 공모에 1등과 3등으로 당선된다. 이듬해 그의 처녀작인 ≪십이월 십이일≫을 ≪조선(朝鮮)≫에 9회(2월∼12월)에 걸쳐 연재한다. 이 소설은 그의 최초의 한글 창작 소설이자 최초의 소설이며, 또한 유일한 장편소설이다. 그해 여름에는 그를 죽음으로 내몬 첫 각혈을 하게 되어 건강이 쇠약해진다.
1931년 7월 <조선과 건축> 표지 도안 현상 공모에 당선된 인연으로 이 잡지의 ‘만필(漫筆)’란에 일문 시 <이상(異常)한 가역반응(可逆反應)>을 발표한다. 시에 전념하면서도 해경은 그림을 놓지 않았으며, 조선미술전람회에 <자화상(自畵像)>이 입선되기에 이른다.
그는 서양화가 구본웅(具本雄)을 알게 된다. 꼽추 구본웅과의 교류는 그의 집으로까지 이어진다. 당시 구본웅의 집은 당대의 시인, 소설가, 화가, 영화감독 등이 모여들던 문화 아지트(구인회)였다. 1934년에 여기에 가입하여 박태원, 이태준, 정지용, 김기림, 김유정, 김환태 등과 교류한 전후로 수많은 작품이 탄생한다.
그러나 이러한 교류와 함께 고려해야 할 것은 백부의 죽음(1932년 5월 7일, 뇌일혈), 총독부 기수직 사임(1933년 3월), 금홍과의 만남과 다방 ‘제비’ 경영(1933년), 동거(1933∼1935년), 결별(1935년), 카페 ‘제비’·‘쓰루’·‘69’·‘무기’ 경영 실패, 결혼(1936년), 죽음(1937년) 등으로 이어지는 그의 생의 형언할 수 없고 돌이킬 수 없는 허무의 심연이다. 이것은 생의 아이러니와 역설을 가능하게 하여 독화(毒花)로서의 미적 파토스를 발생시킨다. 생의 파멸(육체의 죽음)과 예술의 탄생이 아이러니하게 혹은 역설적으로 뒤얽혀 있는 것이다.
1932년 3월과 4월에 소설 <지도(地圖)의 암실(暗室)>과 <휴업(休業)과 사정(事情)>, 시 <건축무한육면각체(建築無限六面角體)>는 그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후 <꽃나무>(1933), <이런 시(詩)>(1933), <거울>(1933)을, 1934년 8월에는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에 우리 시사(詩史)의 기념비적인 작품인 <오감도(烏瞰圖)>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독자의 거센 항의로 15회로 연재가 중단된 이 작품은 근대적인 삶과 예술 전반에 만연해 있는 상투성의 파괴와 해체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방가르드의 한 표상으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그에게 1936년은 생의 한 정점을 이룬다. 무엇보다도 <지주회시>(6월), <날개>(9월), <봉별기>(12월) 같은 그의 생을 총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작품들이 모두 이해에 쓰였다. 그의 생이 맞닥트린 생의 심연을 넘어서려는 강한 열망을 담은 소설이 <날개>라면 <종생기>는 여기에서 훨씬 더 나아가 죽음 이후의 생이라는 역설까지 이야기하고 있다.
1936년 10월 중순경 동경에 건너가 동경부(東京府) 신전구(神田區) 신보정(神保町) 삼정목(三町目) 101의 4호의 니시카와가(西川家)에서 생활한다. 그곳에서 ‘삼사문학(三四文學)’ 동인들과 교유하기도 하고, 김기림, 안회남, 동생인 김운경과 서신을 교유하기도 하지만 동경 생활에 환멸을 느낀다. 1937년 2월 12일 일본 경찰에게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체포되어 니시간다(西神田) 경찰서에 34일간 수감되어 있다가 3월 16일 건강악화로 풀려난다. 결국 그는 1937년 4월 17일 새벽 동경제대 부속병원에서 생을 마감한다.
엮은이
이재복(李在福)은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이상 소설의 몸과 근대성에 관한 연구>(2001)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96년 ≪소설과 사상≫ 겨울호에 평론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문화계간지 ≪쿨투라≫, 인문·사회 저널 ≪본질과 현상≫, 문학계간지 ≪열린 시학≫, ≪시인≫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4년에 제5회 젊은 평론가상과 제9회 고석규 비평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한양대학교 한국언어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 ≪몸≫, ≪비만한 이성≫, ≪한국문학과 몸의 시학≫, ≪현대문학의 흐름과 전망≫, ≪몸과 몸짓문화의 리얼리티≫(공저), ≪몸의 위기≫(공저), ≪한국현대예술사대계≫(공저) 등이 있다.
차례
날개
종생기(終生記)
지주회시(鼅鼄會豕)
봉별기(逢別記)
실화(失花)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剝製가 되어버린 天才’를 아시오? 나는 愉快하오. 이런 때 戀愛까지가 愉快하오.
肉身이 흐느적흐느적하도록 疲勞했을 때만 情神이 銀貨처럼 맑소. 니코틴이 내 蛔ㅅ배 알는 배ㅅ속으로 숨이면 머리속에 의례히 白紙가 準備되는 법이오. 그 웋에다 나는 윗트와 파라독스를 바둑 布石처럼 느러놓ㅅ오. 可恐할 常識의 病이오.
-<날개>